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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기독교만 이중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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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저스틴 댓글 0건 조회 236회 작성일 20-08-30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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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만 이중 잣대?”

몇 개월간 머리와 가슴으로 씨름하던 이슈였습니다. 조심스럽게 제 생각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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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노릇

정부의 '교회 소모임 금지' 발표 이후 교인과 목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피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행히 조만간 풀린다고 하니 감사할 일이지만, 그 여파와 마음의 생채기는 쉽게 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영적 생명줄인 예배가 닫히고, 성도의 영성이 메말라가고 있는데, 소모임 마저 닫힌데다 국민들의 기피현상이라니 숨통을 죄어오는 상황입니다.

정부의 결정에 대한 언론에 드러나는 교계의 목소리는 대부분 “왜 기독교만 이중 잣대로 대하는가?” “교회 소모임을 금지하려면 이태원 클럽도 금지하라”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정부는 누가 봐도 형평성에 어긋난 행동을 했습니다.

당연히 화가 나고, 답답한 마음 이를데 없을 것입니다. 저도 핏대가 솟을만큼 분통이 터지고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정부는 타 종교에는 관대한데 기독교에 대해서만 유독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상황에 대한 주의 뜻을 구하고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숨막히는 현실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서 이러한 현실을 직면케 하신 그분의 뜻을 겸허히 묻고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자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진짜가 진짜 노릇을 못하니 더 채찍을 맞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교회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 권세자들을 통해 일침을 허락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진짜가 제구실을 못할 때, 더 실망합니다. 누구보다 희생적이고, 누구보다 사랑하고,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나라를 지켜내고, 누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갔던 기독교가 타종교보다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성공에 집착하고, 가진자들만의 리그처럼 변질되는 모습에 세상이 실망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호되게 책망하시던 예수님께서 한국교회의 종교지도자들을 만나면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오히려 세상은 기독교가 신앙의 본질을, 본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일마다 교회가는 성도들을 바라보는 비신자들이 '제대로 예수 믿어야 하는데..' 걱정한다는 우스겟소리가 어쩌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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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적

요즘 우리가 직면해야 할 기독교의 적은 우리 내부에 있다는 생각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적이 어느 부류보다 종교적 욕망에 사로잡힌 종교지도자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가장 신성한 것이 변질되면 마성적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신성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는 경건의 삶을 살지 못할 때, 그 누구보다 더 추악한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우상숭배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보다 건물 자체를 우상처럼 떠받들던 예루살렘 성전까지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지고, 이방인의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유기하셨지요. 이런 일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서 참으로 두렵습니다.

십 수년 전부터 기독교는 개독교라는 멸시에 가까운 욕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로 정의합니다. ‘기독’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자 음역입니다. 그러니 문자적으로만 보면, 개독교의 의미는 ‘그리스도’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개’ 취급하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표현입니다.

물론 개독교라는 명칭이 쓰이게 된 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나무위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극단적이고, 자기들만 잘 믿고 잘 사는 선민 의식에다가, 편협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서술했습니다.

그 결과 일반 시민들에게 비춰진 기독교인의 모습은 ’모순으로 범벅된 믿음에 빠져서 민폐를 끼치며 이웃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악감정들이 임계점에 도달해서 결국 비하하는 의미의 접두사 ‘개’를 붙인 “개 같은 기독교”의 의미로 기독교인들을 멸칭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개독이라는 멸칭과 전혀 상관없이 예수를 본받아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기독교 종교 자체를 욕 같은 뉘앙스로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분명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취급함으로써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짓밟히게 만든 교회의 죄악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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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있는 자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신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지 못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에스겔 36장 20-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결코 가볍게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더럽혀진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는 사안에 대해 매우 심각한 어조로 접근하십니다. 특별히 이방 사람들에게 그 거룩하심을 밝히 드러내실 것이라고 거듭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이 ‘거룩’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이길래 ‘거룩한 이름의 회복’을 이토록 중시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I AM WHO I AM' 이 외에 그분의 이름을 붙일 만한 어떤 이름도 이 우주 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주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우리는 어느 누구도 그분의 이름을 짓거나 논할 자격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에게도 제한되시거나 구속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초월해서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의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고, 우리의 제한된 생각과 가치로 감히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여호와'가 나오면 너무나 거룩하신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발음하지 않고 넘어가거나 '그 이름' 또는 '나의 주님'(아도나이)로 대체해서 부릅니다.

이처럼 거룩하고 존귀하신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욕보이고 땅에 짓밟혀 더럽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거룩은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합니다. 즉 거룩은 더러움과 분리된 상태, 잘라내어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것을 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합니다. 가까이 하지 않고 거리를 둡니다. 썩은 부분은 잘라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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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노하는 사랑

하나님은 그 속성상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에 대해 본능적으로 가까이 하실 수 없습니다. 때로는 잘라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우리를 진노로 심판하실 수 있냐구요? 저도 최근까지 이것이 모순처럼 보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니까 이것이 결코 모순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절대적 속성과 성품적 속성이 있습니다. 절대적 속성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입니다: 편재(Omnipresence), 전지(Omniscience), 전능(Omnipotence), 불변(Immutability), 지존(주권 Sovereignty). 거룩(Holiness) 등입니다.

성품적 속성은 상대적으로 인간에게도 발견되는 속성입니다. 의로우심, 선하심, 사랑, 자비, 공의, 긍휼하심, 진실하심, 은혜로우심, 성실하심 등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하나님의 속성은 서로 상충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완벽한 하나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하반절)

예일대 조직신학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죄에 대해 진노하지 않는 신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불의와 기만과 폭력의 공범일 뿐이다. 인간의 분노는 문제를 일으키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는 세상을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마틴 L. 존스도 “절대로 하나님의 속성을 따로 분리시키지 말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는 서로 대치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그것을 잊고서 그분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이며 위험인가?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만 있고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의 개념이 없어진다면 그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우주에 충만합니다. 그분의 의는 사랑이라는 속성 안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짖고 땅을 더럽힐 때 죄에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심판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 아닌 은혜와 함께 역사합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 사랑 안에서 은혜와 공의가 함께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성민, 즉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죄악으로 땅을 더럽혔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까지 더럽혔습니다. 그러니 사랑이신 하나님이시지만 거룩하신 본성이 이스라엘을 본능적으로 가까이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는 너무나 완전하셔서 죄인인 우리가 그분의 찬란한 의의 빛 앞에 드러날 때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살리고, 유예를 주고, 오래 참도록 거리를 두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서 잘라내어 분리시키고, 먼 이방 나라로 흩으시는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진단이지만, 이런 일이 지금 우리에게 닥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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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재앙

코로나의 확산으로 온라인 예배를 시작하던 3월 중순, 역대하 7:13-14을 묵상하며 깜짝 놀랐습니다. 13절에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서 등장하는 3가지 재난이 최근 지구촌에서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얼마 전 호주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입니다. 전문가들이 지적한 이번 초대형 호주 산불의 원인은 고온과 가뭄 즉,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현재 중국으로 이동하는 4천억 마리의 메뚜기 떼입니다. 이 사막 메뚜기 떼는 지나가는 곳을 초토화 시키는데, 1t의 메뚜기 떼가 하루 사람 2,500명 분의 식량을 없앤다고 합니다. 마지막 셋째는 지금 전 세계 육십만 명을 사망케 한 코로나19 전염병의 대유행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내가 하늘을 닫고”라는 표현은 무서운 단어입니다. 하늘 문이 닫히면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멈춰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막혀서 작동하지 못할 때 신자나 비신자 모두에게 국가적, 인류적 재난이 일어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아무 문제 없이 편안한 일상을 살 수 있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부재만큼 무서운 세상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선하심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인간의 죄가 관영할 때, 너무 오래 지속 될 때, 그분의 거룩하심이 진노를 유발하여 죄악 된 세상을 유기하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하늘 문이 닫히고 메뚜기떼가 일어나고 전염병이 창궐한 이유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치신다'는 정도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더 깊이 묵상해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할 때 이런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는 무거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원인이, 바로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규현 목사의 표현처럼 ‘역사의 흥망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달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결국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수레바퀴를 돌릴 핵심 역할을 우리 그리스도인이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맞기지 안으시고 다윗과 같이 ‘마음에 합한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 자를 통해 역사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행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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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운동

지금 우리 시대는 역대하 7:13-14을 통과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지난 5개월 동안 제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죄가 이 땅에 관영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세상에 짓밟히기를 벌써 십 수년째입니다.

처음에는 예배가 닫혔습니다. 최근에는 소모임까지 닫히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기피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재로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진 않았어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우리의 예배와 교제는 손발이 잘렸고, 우리의 명예는 땅에 떨어져 기피대상이 되었으며, 차별금지법으로 전도의 자유는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더럽힌 우리의 편협과 탐욕, 거짓과 모순, 죄악과 배교로 인해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우리를 유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기는 영원한 멸망에로의 유기가 아닌 우리를 정결케 하고 더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한 연단의 기간이요, 은혜의 공의이니,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두렵습니다. 그분의 완전하신 의 앞에 우리의 죄악이 백주 대낮에 다 드러나고, 백성들 앞에 교회의 수치가 모두 발가벗겨질까봐 부끄럽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을까봐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와 수치를 짊어지심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 회복의 기쁨과 동의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뼈가 깨어지고, 몸이 찢겨지고, 영혼이 산산조각나심으로, 우리의 죄악이 깨어지고, 우리의 무지가 찢겨지고, 우리의 탐욕이 산산조각 나는 아픔이기에 이 두려움은 구원의 즐거움과 동의어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나라의 불공평을 바로잡기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나라를 원망하기 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비합리를 지적하기 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짓밟은 우리 자신의 끔찍한 죄악을 현미경으로 파헤쳐야 합니다. 저들의 형평성을 따지고 늘어지기보다 우리의 즉물적 욕망과 철저한 자기중심적 죄성을 깨뜨리기 위해 자아를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교회 종교지도자들은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할 때입니다. 나아가 오히려 우리를 핍박하는 정치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다림줄이 저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질 것입니다.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온 땅위에 충만하신 그분의 영광이 잠시만 드러나도, 온 세상은 두려움에 떨 것이고, 비합리, 편파적, 형평성 같은 이슈는 바닷가의 모래알이 파도에 휩쓸리듯 일순간 평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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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가

소모임을 못한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북한은 70년이나 못하고 있지만, 신앙의 순도는 더 높아졌고, 중국은 탄압 속에서 순결한 헌신과 복음의 확산이 더 승해지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이 막히면, 온라인을 개발하면 됩니다.

온라인은 비성경적이라구요? 온라인 예배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요? 온라인도 하나님의 피조세계입니다. 하나님은 버츄얼 세상에도 임재하십니다. 아니 그분께는 이 세계가 더 익숙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가상현실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전세계 20억 명을 동시에 만나시는 다차원의 세계를 시공을 초월하여 자유자재로 왕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평등케 하고 죄를 공유시키는 온라인 세계를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더 활발히 공유되고 확산되기를 기대하신다는 생각이 허황된 망상에 불과할까요?

저는 확신컨데 하나님은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과 동일하게 통치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막혔을 때 온라인 세상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적극 활용하고 연구개발할 때가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 하나님을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사랑하는가(마 22:37,38)에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지체들과 하나됨을 위해 얼마나 사랑하고 애쓰는가(막 12:33)에 있습니다. 날마다 면류관을 뒤로 던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는가(마 16:24)에 있습니다.

특히,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줄로 재어준 그 아름다운 구역(시 16:6)을 더럽히고, 그분의 이름을 더럽힌 교회와 지도자들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겸비하여 기도하는 대대적인 회개의 운동이 한반도 구석 구석 교회마다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거룩하신 그 이름을 회복하시고, 코로나와 당파로 병든 이 땅을 고치시는(역 7:14 I will heal their land) 회복이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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