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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랑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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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저스틴 댓글 0건 조회 278회 작성일 20-02-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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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회복


김진호 목사


 

사랑이 홍수 난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이 홍수 난 세상이다. 사랑이 자기중심의 아이디어가 되고, 사랑이 상품화 되고, 사랑이 정치가 되고, 사랑이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폭탄이 되기도 한다. 요즘, 한국사회의 관계문화의 오염도를 측량할 수 있는 드라마 ‘유혹’을 보면서 염려가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과 함께 보았다. 뒤틀려진 관계파괴를 서슴지 않게 전개하는 드라마의 흐름을 보다 못해 ‘아빠, 이런 것 보면 안 돼요’라고 한 마디를 던지며 마음을 닫아버린 그 날 이후로 무관심이다. 속으로 주님께 감사했다. 아이들 안에 건강한 가치가 자리를 잡은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한편의 드라마를 통해서 작가 안에 흐르는 드라마 전체의 구성과 전개를 보면서 한 소설이 생각났다.  그것은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자유부인(自由夫人)’이다. 대학교수 부인이 이웃집 대학생과 춤바람이 나고, 대학교수가 미군 부대 타이피스트와 연애를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곧 장안의 화제가 되어 신문은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또한 문학의 도덕성 문제를 놓고 격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특무대의 요원들은 그에게 김일성의 지시로 대한민국을 음란, 퇴폐하게 묘사해 적화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냐고 고문하였고, ‘중공군 40만 명보다 더 무서운 해독’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문자로 전달된 연재소설 ‘자유부인’은 전통과 현대의 두 조류가 만나는 시점의 문화충격을 준 일종의 ‘문화 콘텐츠’였다.  그 후, 60년이 지난 오늘, 사랑을 주제로 한 ‘유혹(誘惑) ‘ 앞에 앉은 시청자들과 그 당시의 독자들 간에는 너무나 큰 간극(間隙)이 있다. 


이러한 시대 변이(變異) 속에서 일어나는 대중문화의 변화를 보면서 시청률을 높이고자하는 제작진의 야망과 TV라는 공적 소통채널 안에서 작가 자신의 도덕성을 커버하면서 봉합하기에는 너무나 크게 벌어진 드라마 속의 관계를 어떻게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는 결론으로 맺어줄 것인지가 궁금하다. 전통적이고 전 근대적인 해피엔딩으로 끝을 내야 한다는 이유는 없지만 말이다. 

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세상 읽기 창으로 들여다 본 ‘유혹’이라는 드라마가 끌고 가는 흐름을 보면서 나의 마음에 내려지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가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인지를 보게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인간 구속역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갈보리 십자가에 나타났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능과 권세(Power & Authority)’의 실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그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이 우리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Agape)이라는 DNA가 있다. 바로 이 DNA 위에 성령의 사랑이 부어질 때에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회복’이 시작된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 말이다. 

 

사랑회복의 지름길로 향하는 기본 이해의 틀,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가 흐르는 십자가는 ‘사랑의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다. 사실 ‘회복’이라는 어의적인 의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는데 이런 의미에서 회복이 되었다는 기준과 증거는 십자가를 아는 것 외에 무엇일까? 십자가는 사형의 틀이었다. 그 틀 위에 아버지는 아들을 못에 박혀 죽게 하셨다. 물과 피를 다 솥아 그 안에 흐르는 생명을 주셨다. 십자가가 사랑이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 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주님이 그곳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에릭 프롬(Erich Fromm)’이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성경의 역사를 소유와 존재간의 갈등을 그린 이야기로 간파하면서 사회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역시 소유함으로부터 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로 존재되어야 한다고 풀었다는 점에서 찬사를 보낸다. 실로 그는 사회현상을 통해서 진리의 실상의 맥을 짚었기 때문에 그의 통찰은 탁월했다고 믿는다. 그가 파란유리를 예로 들면서 유리가 우리 눈에 파란이유는 파란색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파란유리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파란색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 파란유리로 인식된다고 하였듯이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생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생명이 되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의 생명은 주심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사랑으로 확증한 사랑이 낳은 구체적인 열매인 것이다. 이 사랑을 진실로 아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의 감동된 불꽃이 있다. 이 사랑의 불꽃이 있으면 그 사랑을 전하게 된다. 명령이기 때문에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흐르기 때문에 증거되어 진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의 불꽃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사랑의 회복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문화를 가장 간단히 ‘삶의 방식(ways of life)’으로 정의 할 때에 사랑은 하나님나라 문화의 DNA가 아닐까?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되어지는 재생산을 위한 생명출산의 시작은 십자가 안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그 사랑의 역사다. 


예수의 삶의 방식(ways of Jesus life)을 예수문화의 다림줄로 받아드릴 때, 그 삶이 꽃을 피운 갈보리 십자가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의 회복’의 동력임을 안다. 그 동력과 연합되는 곳이 십자가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십자가와 연합된 제자들에게 만이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힘(Power)과 권세(Authority)가 흐른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회복이 시작되는 십자가야말로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문화 대명령(지배, 정복, 다스림)’을 위한 지름길이자 출발선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회복의 중심이자 출발선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받아드릴 때에 사랑 안에 있는 생명의 씨로 인하여 죽음은 물러가고 생명(조에)이 회복되었다. 이 사랑회복을 위해서 제사장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던 이스라엘은 그 사랑에서 벗어나기를 식은 죽먹듯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사랑회복을 위해서 “내가 너희의 남편이다”(사54:5).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고 싶다”(호2:19)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확실히 증거하도록 호세아에게 창녀 같은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셨다. 호세아는 순종하였지만 고멜은 호세아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 3:1)고 하셨다. 회복하라는 명령이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는 ‘역사되어지는 힘과 성품’이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명령에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다. 


하나님은 호세아서를 통하여 사랑이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가 되어야 하고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을 찾으신다.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진 예배자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는 힘, 하늘의 감동을 입을 수 있는 힘인 불같은 성령과 불같은 사랑을 오순절 날 모든 육체 위에 부으셨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을 말이다. 

 

문화의 원조이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1서 4:16- 1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사랑의 회복이 일어나는 전환점(Turning point)을 찾았다. 갈보리의 십자가(十字架) 말이다. 십자가가 능력인 것은 거기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이 십자가의 사랑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으로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다. 여기에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삶이 되는 역사가 시작된다. 


사단은 지난 이천년 동안 십자가 안에 흐르는 주님의 강력한 메시지를 읽지 못하도록 연막전술을 써왔다. 십자가 현장에서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주님의 숨지심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고 고백하였다. 이것을 아는 사단은 십자가에 흐르는 사랑의 감동을 차단시키려고 수단과 방법가리지 않고 있다. 오늘날 이 연막이 교회 안에 가득하다. 그러니 사랑장애인들이 넘치는 것이 아닐까?


사단은 왜 그러한 연막 전술을 써왔는가?

사단은 십자가가 사랑회복의 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부터 사단은 십자가로 향하는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 사단이 접근하여 유혹한 목적도 십자가를 향하는 길을 원천봉쇄하려는데 있었다. 특별히 첫째와 두 번째 유혹에 실패했던 사단은 마치 자신의 긍극적인 운명을 알고있는 듯 마지막 세 번째 유혹 안에는 절박함이 보인다. 그래서 그의 대화를 대본화해 보면 이렇다.  

“예수, 나에게 한번만 절하면 천하만국을 너에게 주겠다. 그러면 십자가에 죽으러 가는 길, 그 고난의 길을 갈 필요도 없어. 단 한번만 절해봐 너에게 넘겨줄 테니까” 


사단은 십자가야말로 자신 안에 흐르는 결정적인 권세를 상실케 하는 가장 강력한 능력인 사랑이 보혈의 능력으로 흘러내리는 곳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능력, 사랑의 능력이 십자가에서 생명의 능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보혈 안에 생명을 회복시키는 회복의 능력이 흐르기에 말이다. 


제자의 도에 불을 붙인 성령님

이 아가페 사랑이 제자들 안에서 증폭된 역사는 오순절 날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날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호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16:7, 현대인)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날 말이다. 그날, 제자들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날 이후, 십자가 사건 이전에 서로를 향하여 경쟁대상으로 바라보며 불편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제자들이 더 이상 아니었다. 불같은 성령은 불같은 사랑이 그들의 가장 깊은 곳으로 부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처럼 흘렀다. 그날부터 제자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강하고 담대하게 전하는 증인이 되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고 하신 제자도(弟子道)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졌다.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삶의 방식에 확실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의 기본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에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이후에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삶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흐름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같이 남기신 ‘선교 대 명령(Mission Mandate)’에 순종하는 힘(Dunamis)의 흐름으로서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도 사랑이어야 맞다. 

예전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로부터 흘러 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신분을 회복시켰다. 이 회복된 신분이란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아담의 전적타락으로 미움이 우리 안에서 가시나무와 엉컹퀴처럼 자랐다. 이것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주님의 몸에 온 인류의 온갖 죄와 상처가 부어졌다. 아버지께서 싫어하신바 되어 십자가의 아들로부터 등을 돌리셨다. 우리의 신분회복을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의 저주를 받으셨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신분을 회복시키시는데 있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약속대로 부활로 이어지고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어 주신 목적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는데 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쓰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자리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 안에 있고 그 안에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있음을 아시기에 육신의 소욕(desire)을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신분대로 살 수 있도록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신다. 바로 그곳이 세상의 중심인 지성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우리는 날마다 새힘과 새성품으로 세움을 받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눈(가치)과 마음(중심/뜻)이 있다.(cf. 대하7:16)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사랑이듯이 사랑이다. 이것이 자녀된 우리의 자아상이 되어야 한다. 죄악이 창궐하는 이 세상에서 육신을 쓰고 사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능력의 기름부음 안에서 변화를 받아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드릴 수 있기에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고백으로 살아가는 예배자는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보는 사랑과 관심이 열린다. 그제야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내려지고 세상의 중심에 십자가를 세우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을 성령받은 증인으로 드리게 된다. 이것이 사랑회복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곳을 안다면 말이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계11:8)

 

사랑의 회복의 기본은 ‘예수님의 후반전’ 통로가 되어야 한다.

나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하신 말씀 속에서 나의 삶이 생명과 풍성을 위해 통로로 드려져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결론이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화려한 종교적 착각과 냉엄한 광야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아픔들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사실, 고백한다는 것은 과정에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하신 말씀으로 보면 아직도 사랑을 가슴으로 알아가기를 원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불같은 성령과 불같은 사랑”을 노래하게 된다. 사랑이 생명을 낳고, 생명이 풍성해지는 근원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러한 나로 빗으시는 주님은 ‘예수님의 후반전’의 통로로 부르셨다.

1997년 선교사였던 내가 목회자의 옷을 입었다. 교회 개척이었다. 주님은 체질에 맞지 않는 목회로 나의 마음을 돌려서 부르셨다. 하나님의 이유가 있다고 믿고 순종은 하였다. 목회를 배운 적이 없는 나는 선교사의 마인드 안에서 선교를 위한 수단으로 보고 목회를 드라이빙 하기 시작했다. 이민 교회로서 순조롭게 성장을 하였다. 그런데 그 성장이 주는 기쁨은 있었지만 내 안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기쁨은 아니었다. 


결국, 주님의 다스림 안에서 교회는 ‘성장모드’에서 ‘건강모드’로 전환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하나님은 목회광야를 걷게 하셨다. 이미 개인의 광야학교를 거친 다음에 찾아온 이 사역광야학교가 시작된 것이었다. 사실 개인 광야학교에서 주님이 가르친 것은 두 가지였다. “내 안에 거룩함이란 하나도 없는 것과 날마다 나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였다. 그런데 개인광야를 졸업하던 날, 주님은 “이제 진짜 광야의 시작이야”라고 말씀하셨다. 사실은 싫었다. 나중에 깨달을 것이지만 사역광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 후에 주님이 목회로 부르시고 나를 디자인하신 뜻을 따라 넣으신 사역광야학교를 지나면서도 두 가지를 가르쳐 주셨다. 

첫째는 세상을 감당하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거룩함이라는 것과, 둘째는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용장을 세우는 것이 자아를 십자가 제단에 못 박은 제자, 즉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산 제물로 자신을 올려드리는 참된 예배자를 세우는 것임을 사역광야 속에서 확증케 하셨다는 점이다. 

주님은 나의 이 두 광야를 통해서 내 안에서 익숙해져서 종교화 되어있는 부분들을 보게 하셨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다. 

 

이 놀라운 은혜로 다가온 복을 풀어보면 이것 역시 두 가지다. 

그 두 가지는 사랑과 생명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성과 같이 분리될 수 없는 계명(예배)과 사명(선교)이다. 나는 이 안에서 ‘사랑의 회복’을 위한 방정식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교인들을 제자화 하는데 열과 성을 솟았다.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용장을 세우는 사역을 심도 깊게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몸에서 떠나는 현상을 보게 되었다. 사실, 교회가 개척되면서부터 세 번에 걸쳐서 교회를 향한 예언적인 주님의 말씀이 시간대를 달리하면서 있었다. 공동적인 것은 교인들을 흩으신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시작됨을 감지하게 될 때에 주님은 예수마을 교회를 일종의 실험실로 다스린다는 마음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한동안 그것은 나만이 알고 가야할 다스림의 현실이었기에 현실 속에서 들어나는 현상을 넘어 실상을 볼 수 없는 이들로부터 들려오는 말들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 고통은 자아가 살아있는 교만의 실상을 보는 거울이었다. 그러한 고통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건강모드로 가는 교회의 자연적 성장을 일으키는 생명에 대한 이해에 근본적인 문제가 내 안에 있음을 보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그 생명을 사랑에서 분리해서 사역 힘으로 보고 있는 불순한 생각이었다. 그것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그 목적마저도 수단화 한 나의 잠재된 생각을 생각의 수면 위에 올리셔서 보게 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처참한 나의 본 모습이었다. 영적인 문둥병의 반점들이었다. 그렇지만 뒤집어보면, 너무 감격스러운 잊지 못할 기념비적인 은혜의 순간이었다. 나는 그날 새벽을 잊을 수 없다.


사랑이 생명을 회복하는 원동력임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가슴으로 알게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내 안에서부터 노래하게 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불같은 성령, 불같은 사랑”이다. 


그런 어간(御間)에, 2014년 송구영신 예배를 준비하면서 나의 목회현장인 예수마을 교회에 ‘여름’을 주시겠다는 마음의 음성을 듣게 하셨다. 여름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기도하면서 여름을 선포하였다. 그런 가운데, 6월 12일 부터 브라질 월드컵이 열렸다. 한국이 16강전에 진출하였지만 역부족으로 탈락되었다. 그런데 16강전이 끝이 났을 때, 집사님 한 분이 뜬금없이 이러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목사님, 이번 16강전에 전후반전 모두 합해서 18골이 났는데요. 그 중에 전반전에는 3꼴이고 후반전에는 15꼴이 났다고 하네요”


이 말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가슴에 불같이 들어오면서 여름에 대한 해석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의 흐름을 통하여 이렇게 다가왔다.  전반전 3 골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함께(with) 하셨던 때의 ‘예수님의 사역’을 말한다면, 후반전 15골은 성령의 불이 혀 같이 갈라지듯 임하였던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를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졌을 때 그들을 통하여 ‘그 배에서 생수의 강처럼 흘러 나는’ 성령의 생수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다른 보혜사’(요14:16)로 제자들을 통하여 역사되어지는 예수님의 후반전 사역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예전에도 나의 사역 속에서 흐르기도 했던 통속적인 성령사역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물론,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있는 하프타임의 의미는 성공과 성취 중심의 삶으로 뛰어온 삶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 열매를 맺는 성숙한 삶으로 변환시키기를 권면한 밥 버포드(Bob Buford)의 ‘하프타임’, 에 흐르는 내용처럼,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하프타임 15분은 40일 간 연약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선교학의 대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대하여 특강을 해 주시면서 그들이 받을 성령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그 시간은 제자들이 전반전을 돌아보며 후반전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을 받는 하프타임이었을 것이다. 


이 하프타임 40일이 차 갈 때에 주님은 몇 날이 못 되어 받을 성령에 대하여 약속하시고 하늘로 올라 가셨다. 어떻게 보면, 이 땅에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부재(不在)가 일어났고 제자들은 두려웠다. 그들을 잡으려고 충혈이 된 종교깡패들을 피하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두려움과 더불어서 주님의 약속한 말씀을 붙잡고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그 때에,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에, 타임라인을 그으시듯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성령님이 불 같이 그들 위에 임하셨다. 그날 이후 제자들은 영혼을 향한 불같은 사랑으로 예수님처럼 그들 안에 충만한 예수의 영, 성령의 흐르는 역사를 통하여 생명을 주고 더욱 풍성케 하러 오신 예수님의 후반전 사역이 그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제자들의 후반전 사역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을 통로 삼아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후반전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후반전은 우리를 통하여 주님이 뛰시는 후반전이다. 우리가 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뛰어서 성장은 할 수 있다. 교회도 종교사회학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의 조직이다. 이 조직에 사람의 경영이론을 걸으면 육적인 성공과 성취 일변도의 무서운 힘을 발할 수 있다. 영적인 힘이 제한되고 혼적인 힘이 강성하게 나타난다. 다른 복음(긍정복음, 번영복음)으로 인하여 성장을 경험한 기독교종교 단체에 나타나는 현상이 그것이다. 

결코, 성장이 죄가 아니다. 성장해야 한다. 성숙되지 않은 성장이 주님의 마음을 힘들게 했음을 사역의 잎은 무성했지만 열매 없는 삶을 살았던 이에게 악하고 개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즈음 그러한 성장에 드라이빙을 걸었던 종교조직 같은 교회는 장애현상 속에서 당황해 하고 있다. 그 안에서 일단 문제가 터지면 수습할 성품의 열매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법정으로 간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를 세상의 법으로 판단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많이 생기니까 세상은 개독교라고 비아냥거린다. 사랑이 식어버린 라오디게아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으로 인하여 메마른 영혼과 사회에 물을 대어주는 축복의 통로이다. 변질을 변화로 전환시키시는 새힘과 새성품의 통로이다. 그래서 나는 본 나눔의 주제인 ’사랑의 회복‘의 기본 값 설정을 위한 기준을 여기에 두었다. 그리고 이 글 안에 흐르는 정신을 “사랑이 부흥이다”로 풀고 싶다. 참된 예배자 안에 부어지는 불같은 성령과 사랑이 부흥을 일으키는 역사가 성전인 우리 안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49-50)

물론, 이 불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이들도 있다. 그럴 때는 내 안에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어느 해석 안에 ‘하나님의 성품과 소원’이 흐르고 있는가이다. 그런 면에서 ‘불같은 성령, 불같은 사랑’을 노래하며 가는 나에게 있어서 주님이 던지고 싶으신 이 불은 우리를 동역자로 세우셔서 우리 안에서 달려가기를 원하시는 불같은 성령과 불같은 사랑으로 다가 올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열심히 흐르는 불로서 말이다.


맺는 나눔

우리가 진실로 사랑해야 할 세상에서는 사랑이 유혹의 도구로도 전도(顚倒)되었다. 형용색색의 사랑들이 홍수가 나있다.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울고, 사랑에 죽는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은 추운 광야에 불기둥과 같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패역했어도 밤이 되면 불기둥을 피어 올렸다. 그런데 낯에는 불기둥이 변하여 시원한 물기둥이 되었다. 광야에 함께 하셨던 사랑의 하나님의 임마누엘이었다.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0-22)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다. 이런 세상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셔서 이렇게 동역하셨음을 심비에 새기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일생을 요약한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서 나타난 말씀 속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10:30)고 하셨던 주님의 예배(계명)와 선교(사명)의 다림줄을 보아야 한다. 둘로 나누어 질 수 없는 하나로 주님의 삶 속에 흘렀던 모습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에게도 우리 안(in)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흘러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는 말씀에 힘을 얻어 바라보는 자에게 오전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님이 하신 것보다 더욱 큰 것도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붙잡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심령의 제단에 불이 타오르는 예배자 말이다. 


우리 ‘다리놓는사람들’이라는 몸은 요한복음 10장 10절의 ‘생명’과 ‘풍성’에 대한 실존적 해석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예배라는 주요한 주제로 한국교회를 섬겨왔다. 그런데 교회의 모습이 던져주는 주님의 메시지 앞에서 예배를 어떻게 삶으로 풀어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셨다. 그 고민은 ‘삶의 예배’로도 내다보게 하였다. 그리고 ‘문화(文化)’라는 채널을 통하여 내다보면서 한 걸음 더 구체적인 앞으로의 행보를 제시하고 삶과 사역으로 옮겨가야할 시점에 세워진 것 같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다리놓는사람들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감사한 것은 우리가 이 고민을 풀어가는 동력을 사랑에서 찾았기에 ‘사랑의 회복’을 ‘하나님 마음으로 문화 사역하기’라는 전략세미나라고 할 수 있는 나눔의 시간에 첫 단추로 그 발제의 제목으로 잡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임 중심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 


나는 한국 사회에 ‘세월호’ 사건이 터지기 전에, 주님은 신천지 사건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알리셨다고 믿는다. 신천지를 두려워하며 대문짝 같은 포스터를 붙이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 중심에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결여로 인한 부끄러운 두려움의 꽃을 피웠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대신에 ‘긍정복음’이나 ‘형통복음’이 이끌어낸 교인들의 중심 속에는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자아가 웅크리고 있음을 본다. 이 자아를 끊어줄 능력은 십자가에서 불을 던지신 주님의 불같은 사랑의 회복 외에는 없다. 이 회복의 증거는 무엇인가? 나는 요한복음 10장 10절을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후반전 사역을 할 수 있는 삶으로 산제물이 되어 이 역사 속에 드려졌느냐의 여부에 있다고 믿는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생명(조에)’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회복사역의 촛점이라면, ‘풍성’은 회복을 넘어 주님의 후반전 사역의 통로로 쓰임을 받을 사람, 예배자들에게 초점이 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역사의 제단에 올린 주님처럼,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이 썩지 않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이신 주님처럼, 왕권을 가진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으로 세상 속(in)에서 세상에 속(of)하지 않으나 세상에 영향력을 흘려보내는 예수님의 후반전에 통로가 될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 


‘풍성(페리소스)’은 질(Quality)과 양(Quantity)에 탁월성(Excellency)이 있음을 말한다. 그 풍성함 안에 흐르는 생명력의 동력은 사랑, 아가페이다. 이번 전략회의의 주제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문화사역하기”이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사랑의 회복을 첫 발제로 잡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게 된다. 이 아가페가 우리 안에서부터 회복되어야 한다. 종교로 가리어진 야만(野蠻)이 흐르는 종교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힘이 흐르는 사랑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제, 회복을 넘어선 축복의 통로를 찾으시는 주님의 눈앞에서 이사야의 불을 경험해야 할 때가 왔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흐르는 불같은 생명력이 꽃을 피운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文化),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실존의 문화, 예배가 삶이되고 삶이 예배가 된 문화의 다리를 놓는 ‘다리놓는사람들’로서 말이다. 


오직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



Ps: 이 글은 2014년 가을에 한국에서 열린 “다리놓는사람들 국제 운영위원회”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문화 사역하기’의 첫 번 발제로서 “사랑의 회복”에 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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